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도가니' 스틸컷
한 영화사가 n번방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한다고 밝혀 논란입니다. 영화 ‘악마의 방’은 디지털 성범죄 등 10대 범죄의 심각성과 미성년자 성착취에 대한 복수를 다룬 내용인데요. 10대 성매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 ‘모범생’, 고 장자연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종이비행기’ 등 사회고발성 영화를 제작해온 노홍식 감독이 연출을 맡습니다.
노 감독은 “10여 년 전부터 미성년자들에게 뻗치는 검은손과 범죄가 독버섯처럼 퍼지는데 어느 누구도 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며 오래 전부터 고발영화를 기획했다고 밝혔습니다. 제작사에 따르면 악마의 방은 올 하반기 촬영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러나 일각에선 영화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피해자들에게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건데요.
피해자가 존재하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 제작, 법으로 막을 수도 있을까요?
◇'제한상영가' 등급 분류시 사실상 상영 불가
원하는 소재를 선택해 영화로 제작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합니다. 표현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되는 국민의 기본권인 만큼 제재할 방법은 없습니다.
실제 일어난 범죄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현행법상 영화의 소재를 이유로 제작이나 상영을 금지하는 규정은 없습니다.
다만 영화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영화비디오법)’에 따라 개봉 전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상영등급을 분류받아야 합니다. 영화의 상영등급은 △전체관람가 △12세 이상 관람가 △15세 이상 관람가 △청소년 관람불가 △제한상영가 등 총 5개로 나뉘는데요.
이 중 ‘제한상영가’는 영화 속 선정성·폭력성·사회적 행위 등의 표현이 과도해 인간의 보편적 존엄, 사회적 가치, 선량한 풍속 또는 국민정서를 현저하게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내려지는 등급입니다. 영화비디오법 시행령은 제한상영가 등급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별표 2의 2]
5. 제한상영가 기준
가. 주제 및 내용은 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여 국가 정체성을 현저히 훼손하거나 범죄 등 반사회적 행위를 조장하여 사회질서를 심각하게 문란하게 하는 것
나. 영상의 표현은 선정성·폭력성·공포·약물사용·모방위험 등의 요소가 과도하여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왜곡하거나 사회의 선량한 풍속 또는 국민의 정서를 현저히 손상하는 것
다. 대사의 표현이 장애인 등 특정 계층에 대한 경멸적이고 모욕적 언어를 과도하게 사용하여 인간의 보편적 존엄과 가치를 현저하게 손상하는 것
라. 그 밖에 특정한 사상·종교·풍속 등에 관한 묘사의 반사회성 정도가 극히 심하여 예술적·문화적·교육적·과학적·사회적 가치 등이 현저히 훼손된다고 인정되는 것
위 기준에 따라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영화는 일반영화관이 아닌 제한상영관에서만 상영이 가능한데요. 현재 국내에는 제한상영관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상영이 불가능합니다.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도 가능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할 경우 도의적 차원에서 관련 피해자나 유족 등에게 동의를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피해자들의 제작 동의를 받지 않은 영화가 등급심의를 통과해 개봉을 앞둔 경우 피해자 측은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은 말 그대로 법원에 영화의 상영금지 처분을 내려달라고 요구하는 건데요. 해당 영화가 자신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여겨질 경우에 할 수 있는 긴급조치입니다. 이때 해당 영화로 침해받은 권리 또는 침해받을 가능성이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피보전권리’라고 하는데요. 쉽게 말해 '보전처분으로 지킬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경우, 사건 피해자들의 ‘인격권’을 피보전권리로 주장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18년 영화 ‘암수살인’이 개봉을 앞두고 피해자 유족들로부터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당했는데요.
당시 유족 측 변호인은 영화 속 범행이 실제 사건과 거의 일치하는 만큼 유족의 인격권 보호를 위해 영화상영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유족 측이 제작사 사과를 받아들여 소송을 취하하면서 암수살인은 예정대로 개봉했습니다.
가처분 신청은 영화뿐 아니라 책이나 노래를 대상으로도 이뤄지는데요. 2017년 법원은 왜곡 논란이 있었던 ‘전두환 회고록’의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해당 도서의 출판 및 배포를 전면 금지한 바 있습니다.